들어가는 말

전광훈 씨가 일을 벌여도 너무 크게 벌였습니다. 코로나 시국에 서울 도심에서 수만명이 모인 대형집회를 강행했고, 그 직후부터 전 씨 본인을 포함한 수백명의 코로나 확진자가 전국 규모로 급증해버린 것이죠. 전 씨나 그의 지지자들은 “나라를 살리겠다는데 무엇이 대수냐?”며 항변하고 있으나, 그 책임은 한국교회 전체의 몫이 됐습니다. 그리고 그 피해는 수많은 시민들과 방역 현장에서 불철주야 애쓰고 있는 의료진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게 됐죠. 광화문 집회 참석인들에 대한 격리, 치료에만 수조원의 세금이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협조는 커녕, 휴대전화를 꺼버리고 격리시설에서 탈출하며 방역요원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폭력을 행사하기까지 합니다.

전광훈 씨는 참으로 사악한 자입니다. 보석 신청을 할 때의 사유가 병으로 ‘급사’ 직전이어서 요양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는데, 막상 풀려나오자 보석의 조건들을 무시하고 훨훨 날아다니며 온갖 집회와 세미나를 이끌더니만, 급기야는 수많은 국민들을 현재의 위기상황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이죠. 전 씨를 풀어준 허선아 판사, 집회 허가를 내준 박형순 판사도 이 사태에 큰 책임이 있습니다. 꾀병을 중병으로 둔갑시켜 소견서를 써준 의사를 비롯, 전 씨를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수많은 목사, 장로, 권사들도 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전 씨는 8월 15일 집회를 불법으로 강행함으로써 방역당국과 의료진, 국민들이 코로나 19 종식을 위해 함께 애쓴 지난 6개월 간의 노력을 모두 허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한 가지 분명히 해둘 게 있습니다. 전광훈 씨를 ‘목사’로 칭해선 안 된다는 것이죠. 전 씨가 2019년 8월 30일을 기해, 대한예수교장로회(백석대신)로부터 헌법 권징 제 1장 제 3조 1항~11항, 책벌 6조 2항에 의거, 목사직으로부터 면직 및 제명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벼랑 끝에 선 한국 개신교

이번 사태와 같은 파동은 전 씨를 비롯한 몇몇 정치 목사들과 그들의 추종자들, 다시 말해서 한국 개신교의 극히 ‘일부’만 그럴 뿐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어왔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지난 2~3년 사이에 급부상한 소위 “빤스목사” 전 씨. 그런데 같은 시기에 전 씨를 비호하던 수많은 대형교회 목사들, 원로 목사들, 교단장들, 신학자들, 그리고 제 1야당의 개신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그 때 이구동성으로 말했지요. “전 씨가 신학적으로는 문제가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올바른 소리를 하므로 적극 지지한다” 라고요.

작년에 전 씨는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하나님도 나한테 까불면 죽어” 라고. 동서고금을 통틀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상 최악 수준의 신성모독 발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 개신교의 주요 교단과 신학교, 교회 내 책임을 질 위치에 있는 사람들 중 어느 누구 하나 이 발언을 제대로 문제삼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이 사건은 두고두고 한국 개신교 오욕의 역사로써 회자될 것입니다.

입만 열면 정통과 장자 교단을 외쳐대는, 소위 개혁주의 장로교 신학을 믿고 추종하는 사람들도 꿀 먹은 벙어리들이었습니다. 필자는 같은 개혁주의 신학을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서 절망했습니다. 개신교 내에서 교리나 신학적인 옳고 그름보다는 이념과 정치색에 따라 명확하게 편이 갈리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죠. 

이제 그들에게 엄중하게 묻고 싶습니다. 지금도 전 씨에 대한 판단이나 평가엔 아무런 변화가 없는지요? 당신들의 생각은 지금도 유효합니까? 현 정권이 정말로 공산주의 독재정권입니까? 북한에서 살포한 바이러스때문에 지금 대한민국이 코로나 19에 감염된 것이라 믿고 있습니까? 온 나라가 전 씨와 그 추종자들로 인해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들었고, 개신교 교회라면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 이 상황에서 당신들은 무엇을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신천지이건, 전 씨의 추종자들이건, 일반인들의 눈엔 전부 개신교 교회로 보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유독 현 정권을 말도 안 되는 “공산독재정권”으로 낙인 찍으며 정치색을 입혀버린 당신들 때문에 한국 개신교가 벼랑 끝에 섰습니다. 바로 당신들 때문에 이제 젊은 세대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문이 굳게 닫혀버렸습니다.  

한국 개신교는 어디로 가고 있나?

이제 개신교발 코로나 19 확산 정도는 재앙 수준으로 심각해졌습니다. 개신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나 부끄럽고 또 송구합니다. 일부의 문제로 치부할 수가 없습니다. 개신교인들 모두의 잘못입니다. 그러나 더 나아지기 위해, 개혁하기 위해, 문제의 원인을 간과하고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현 상황에서도 “음식점, 카페, 수영장 등, 다수의 사람들이 밀집하는 장소는 놔두면서 왜 교회만 갖고 그러는가? 이것 하나만 봐도 문재인 정부가 교회를 탄압하는 사탄의 세력이란 게 드러나지 않는가?” 라는 논리를 펴는 목사, 신학생, 장로들이 매우 많습니다. 한국 개신교에서만 내는 소리는 아닙니다. 미국에서도, 호주에서도, 비슷한 소리를 내는 개신교인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개신교는 이런 소리를 내는 교회가 유독 많고, 심지어 대놓고 주요 수칙들을 어기기까지 합니다. 아마도, 벌금이나 처벌 수위가 낮아서일 겁니다.

이 분들은 거꾸로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을 해봐야 합니다. 왜 대중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나오는 감염자들 수에 비해 교회에서 나오는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가? 라고. 

그 어느 곳보다도 교회 안에서 교인들이 방역 수칙을 무시하고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수의 개신교 교회에 공공의식과 윤리의식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큰 소리로 기도하고 찬송하는 예배방식을 선호하기 때문에 파생되는 문제입니다. 소그룹 모임을 못한다고 교회가 없어지진 않을 것입니다. 심방도 중요하지만, 전화와 온라인 방식을 더 많이 사용해야 합니다. 헌금액수가 줄어서 걱정되십니까? 기도하십시오. 파트타임 일자리라도 구해보십시오. 

교회건물에 모여야만 예배가 아닙니다. 진리를 알고 진리를 따라 살며, 하나님을 사랑함과 동시에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삶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마가복음 12장 29-31절; 로마서 12장 1, 2절).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셨지 (마태복음 5:13~16절), 혐오의 대상이나 바이러스 확산자가 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현재 한국 개신교회는 큰 ‘골병’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잘못된 ‘믿음’ 때문입니다. “값싼 믿음”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값싼 믿음은 ‘삶이 결여된 믿음’입니다. 머리로만 이해하고 입으로만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교회건물 안에서만, 주일에만 존재하는 믿음입니다. 이웃과 세상엔 관심 없고 개개인의 구원과 영성에만 집중하는 믿음입니다. 성경이 아닌, 좋아하는 목사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소속교회의 성장과 자기 자신에게 돌아올 물질적인 복 만을 추구하는 믿음입니다 (“번영신학”이라고도 하죠). 심지어 “반공”이 기독교 교리의 핵심인 양 착각하는 신념입니다. 이는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렇게 왜곡된 믿음은 교인들을 신실한 삶이 결여된 종교 중독자들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게 바로 많은 한국 개신교회들이 현재 앓고 있는 중병입니다.

한국 개신교는 어디로 가야 하나?

3년 전인 2017년은 마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종교개혁은 돈과 물질주의로 타락해가며 정치세력과 결탁해 권력을 쥐고 썩을대로 썩어가던 중세교회에 맞서서, 교회가 온전히 성경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함을 천명한, 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2017년의 한국 개신교엔 자성이나 성찰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질 않았습니다. 오히려 대형교회의 담임목사 세습제, 정치세력과 결탁해 주변 상가와 거리에 민폐를 주는 대형 교회들의 횡포, 수십억의 헌금이 걷혀도 세금은 내지 않는 이기심과 탐욕 등등. 당장 개혁을 시작해도 모자를 판에, 개혁의 목소리를 내는 소수의 목사와 장로들에게 오히려 철퇴를 내리친 한국 개신교였습니다.  

500명 이상 규모의 교회 담임목사들, 그리고 그들과 견고한 권력/이익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돈 많은 장로들 – 이들의 관심사는 대부분 일정 수준 이상의 ‘기득권’을 사수하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핑계거리를 성경의 말씀인 양 갖다붙이지만, 결국 이들에게 있어서 관건은 돈과 권력 사수입니다. 이들이 갖고 있는 가치관, 세계관, 물욕 등이 그들의 설교와 프로그램을 통해 교인들에게 주입이 됩니다.  

이러한 배타성이 자리한 곳에 기독교의 사랑과 관용이 깃들 수 없고, 세속주의가 득세한 곳에 바른 영성이 싹틀 리 없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낮고 가난한’ 영적 구원의 길 대신, 물신적 탐욕과 정치권력화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전광훈 씨의 행태는 바로 이런 풍토에서 자라난 것입니다.

현 정권이 독재라고요? 독재는 지금처럼 광장정치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1980년 광주학살만행이 독재입니다. 나이 든 농민에게 물대포를 쏴서 죽이는 게 독재입니다. 304명이 물에 빠져 죽어도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 것이 독재입니다. 그들의 독재엔 한 마디도 못하고, 오히려 조찬기도회로 그들에게 아부하던 자들이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향해 함부로 ‘독재’란 단어를 입에 담아선 안 될 것입니다.

상황이 이런 까닭에, 많은 한국교회는 속절없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중병에 걸려 죽어가면서도, 중병에 걸린 것 조차 모르고 도리어 큰 소리를 치는 그 단순함, 무지함, 무례함 때문에 마음이 참 괴롭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500명 이상 규모의 교회들이 건강한 신앙습관을 회복하고, 신앙이 삶과 이웃으로까지 자연스럽게 전이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면, 한국 개신교는 개혁될 수 있습니다. 이들이 건강한 영성과 상식적인 사고, 그리고 공공질서를 중요시하는 태도를 갖추고, 청빈한 삶을 추구하며, 성경에서 입맛에 맞는 구절만 빼내어 아전인수격으로 설교하는 악습을 끊어준다면, 이들이 진정으로 겸손한 자세로 이웃을 섬기기 시작한다면, 한국 개신교는 개혁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이웃의 위생과 건강을 지켜주지 못하고 무리한 종교활동을 벌이다 바이러스를 감염시킨다면 이는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짓는 것이 됩니다. 반대로, 교회가 홍수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삶이 힘들어진 이웃을 물심양면으로 돕고 (예, 인천시 백송교회, 광명시 개봉성결교회), 자기를 희생한 예수의 삶의 방식을 닮아가려 노력한다면, 굳이 지하철 역 앞에서 전도용지 나눠주지 않아도 사람들이 교회로 알아서 찾아들어올 것입니다. 그런 작은 행동의 실천이 성경이 말하는 선교의 첫 걸음이자 진정한 개혁으로 가는 길입니다.

현실적으론 거의 불가능해보이지만, 이제 이 방법 밖엔 남은 게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이 병든 한국 개신교회들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 진정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어주십시오.

나가는 글

전광훈 씨가 자주 언급하는 위대한 목회자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본훼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 입니다. 자주 언급은 해도, 이 분을 잘 알지는 못하는지 “존웨퍼”로 발음을 하더군요. 본훼퍼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루터교회 목사이자, 신학자이며, 반 나치운동가이기도 했습니다. 

본훼퍼 신학은 한 마디로 ‘고난을 함께 나누는 삶의 실천’입니다. 그는 당시 히틀러의 나치주의에 굴복하고 부역하던 독일 교회가 “값싼 은혜”를 나누고 있다며 강력하게 비판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값싼 은혜란, ‘진정한 회개 없이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믿음, 그리스도의 길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믿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고난을 피하려는 믿음’입니다. 즉, 예수의 제자로서 삶이 따라주지 않는 종교적 신앙은 싸구려 신앙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신학과 삶의 골자였습니다. 

돈과 권력, 여자, 그리고 정치에 대한 야욕으로 가득 찬 전광훈 씨의 입에 오르내릴 분이 아닙니다. 전 씨가 언급한 사람은 결코 ‘본훼퍼’일 수가 없습니다. 그의 무지함 속에서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 “존웨퍼”일 뿐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앞으로 한동안, 아니 어쩌면 영원히, 교회 같은 장소에 대규모의 인원이 모여 예배나 종교활동을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제 가정교회와 같은 소규모 모임 중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한국 개신교가 앞서서 모범을 보여주길 바랍니다. 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주십시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본을 보여주십시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희생하며 고난도 달게 받을 수 있는 진정한 예수의 제자가 되어주십시오. 
애끓는 심정으로 기도합니다.

한준희 (Moses Hahn, 카슬힐 호주장로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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