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은 문화를 크게 물질문화(material culture)와 정신문화 (또는 비물질 nonmaterial culture)로 나눈다. 이 2분법은 한 나라를 먼저 경제와 사회로 나누어 평가하게 한다. 양자의  관계는 동전의 양면일 테지만, 한쪽이 잘 되면 다른 한쪽도 언제나 잘 되는 정(正Positive)의 상관관계는 아니다. 
해방 후 부모님을 따라 일본에서 한국에 왔을 때 고국(그때 이름은 조선)은  말도 못하게 가난했다. 보릿고개야 물론, 대부분 농촌 가정은 벼룩과 이가 득실거렸고, 버릴 잡기장 종이도 없어 칙간에 가 지푸라기를  비벼 화장지로 쓰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곳간에서 살인 난다는 속담대로 기아(飢餓)선상에서라면 도덕이고 법이고 체면이고 있을 수 없다. 무조건 물질이 먼저다. 한 때 한국의 중앙 신문의 사설 제목 대로 “경제가 알파요 오메가다.” 요새말로 경제성장제일주의다. 
경제가 발전하고 생산이 늘면 다른 건 금새 좋아질 수 있다. 이때는 물질문화와 정신문화의 발전은 거의 1대1의 함수관계다.
그러나 이 시기가 지나 물질이 넘칠 만큼 풍요해지면 어떻게 될까? 99을 가진 사람이 100을 채우려고 한다는 옛말대로 부자가 얼마고 갖고자 탐욕을 부림으로써 빈부격차가 눈덩이처럼 커지고, 부자는 분수에 넘는 자리와 삶을 추구하니 불의와 부도덕이 만연하고 사회는 불안해진다.
이때는 물질과 정신은 상당 부분 부(否negative)의 상관관계다. 학술용어를 쓴다면 전자는 단순모델 (Linear model), 후자는 하기에 따라 이리 저리로  휘는 복선적 모델 (culvilinear model)이다. 한국은 좋은 사례 연구감이다. 

한국은 부자 나라다? 
왜 이 글을 이렇게 시작하는가? 고국에 대하여 평소 비판적인  시각으로 글을 써온 나의 변(辨)이기도 하다. 그런 시각은 평소 남과의 대화에서 나타나기 마련이어서 가끔 마찰을 겪기도 했었다.  그들의 반박은  그래도 한국은 저렇게 잘 살게 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거꾸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논리다, 여러 가지 경제 지표만이 아니라 현장에 가 눈을 휘둥그러지게 하는 대형 병원, 고충 건물, 첨단 시설, 깨끗한 변소, 돈을 흥청망청 쓰는 사람들을 직접 보면 아니라고 말하기도 쉽지 않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도 한국은 부자 나라라고 했다. 미군 주둔 군사비를 짜내기 위한 말인지 몰라도. 

어떤 지인, 심지어 일부 친척은 내가 해외에 나가 못사니까 고국에 대하여 부정적이라고 말했단다. 그건 아니다. 나는 살기 어려워 떠나 오지 않았다. 그 무렵 나는 원하는 직장을 갖고 안정된 생활을 했었다. 그래도 비판적이었다. 부전자전이라고 할까? 젊어서 돈과 연줄 없이는 장래가 암울했던 사회를 바라보고 일본으로 건너간 부모님과 같은 심정으로  나도 그런 모험을 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고국에 대한 지금의 지적과 비판과 기대는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으며 물질의 풍요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쇄신되어야 한다고 보고 사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태어난 지 70년이 넘는 오늘의 한국의 현실은 어떤가? 아무리 나쁜 언론도 사회를 비취는 거울이다. 멀리 갈 것 없다. 이번  서울과  부산 시장을 뽑는  선거 동안 언론이 보도한 부정적 정치사회상은 가히 놀랄 만하다. 권력을 업고 하는 공직자들의 조직적 부동산 투기, 탈법 이권 개입, 사기, 은폐, 거짓 말, 쓰자면 한이 없다. 한마디로 온통 비리 투성이다. 
모두 가짜 뉴스라고? 그 자체도  후진성이다. 텔레비전, 페이스북, 유튜브에 나와 신랄한 비난,  폭로, 공방전을 벌인  당사자들은  서민들이 아닌 유명 인사들이다. “다, 썩었다”는 제목으로 유튜브에 나와 설교를 한 목사도 있다.
사회가 이렇다면  물질이 흔해도 선진국이 아니며 상류층을 뺀  서민은 행복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매 선거 때 그랬듯이 나라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가 물으면 사람들은 민생, 즉  경제라고 한다. 이게 우리 국민의 수준이 아닌가. 

케인즈 경제
요즘은 코로나19로 세계 어디에서나 경제가 정말 어렵다. 그렇지만 그 전에도 우리에게는 늘 경제가 No1 이슈였고 그 해답으로 경제 성장을 내세웠다. 년 2-5% 프로, 또는 그 이상의 성장과 국민소득 3만 달러, 4만 달러의 목표가 그것이다.   
가난을 나눌 수는  없고 파이(Pie)를 키워 생산에 참여한 구성원에게 그 과실이 돌아가게 한다는 이 성장론의 원조는 케인즈(J. M. Keynes, 1883-1946)다. 그는 세기가 낳은 큰 경제학자지만 분배라든가 성장에 따르는 후유증은 그의 관심 영역은 아니었다. 그건 사회학자, 사회심리학자, 종교가, 양심 있는 지성인들의 몫이지만 경제, 경제만을 외치는 목소리 속에 모두 파묻히고 말았다. 
또 경제는 우리만이 얼마고 엿가락 늘리도록 키울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른 신흥국가들과 극심한 경쟁을 해야 하며  후기 산업사회가 되면  임금이 높아져 성장률은 둔화된다. 거기다가 자원의 고갈, 기후변화, 자연 재해 등이 그 한계를 들어 낸다. 지금의 코로나 사태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잘 살기 위한 케인즈 경제의 한 가지  골자는 ‘부스러기 효과(Trickling-down effects)’다. 낙수효과(落水效果)라고도 불린다. 파이가 커지면  빈부의 격차가 생기기더라도 부자들이 떨어뜨리는 부스러기 덕을 볼 수 있다는 이론이다. 재벌에 대한 작은 협력 업체, 강남의 부자 동네에 모여드는 영세 영업자와 행상들의 사례가 그것인데 그게  쉬운 일인가.   
갑질을 당하는 아파트 경비원은 말할 것 없고,  부자 고객의 필요와 입맛에 맞는 상품과 별의별 서비스를 개발해서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업자들이 느낄 소외감을 생각한다면 그렇다. 잘 살게 되었다지만 빈부격차가 우리 세대에는 죽어도 해소할 수 없을 만큼 커져 사회가  온통 불신과 증오로 차 있어 나라가 저렇게 시끄럽다면 국민통합이 잘 되겠는가.
나는 밖에서 고국을 그저 헐뜯고자 이런 글을 쓰지 않는다. 이미 시사한 것이지만, 이와 같은 현실이 국론을  분열시키고 힘을 빼는  좌우 대결이 계속 된다면 통은 말뿐  영영 오지 않을  것이란 우려 때문이다.  
그 동안의 글에서도 나타난 대로 나는 적어도 윤곽만이라고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건설적이 되고자 노력했다. 그게 리서치를 바탕으로 좀더 깊이 있고  실천적 프로그램이 되었으면 싶지만 지금의 나의 처지에서  그런 일을 할 수 없고, 해 내도 많은 독자에 가 닿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대정부 로비
나는 그런 대안을 쓴다면 경제 성장을 멈추라고 하지 않겠다.  성장을 추진하되 이제는 좀더 정의롭고 공정한 방법으로  하고 그 과정에 국민의 역할과 구체적 실천 방안을 부각하겠다. “윗물이 맑아야 아래물이 맑다”고 하며 비리의 뿌리를 권력에 돌리지만, 잘 살펴보면 국민의 책임도 크다는 점을 부각시키겠다. “탱고를 혼자 출 수 없다(It takes two to tango)”는 영어 표현대도 불의와 비리를 권력자 혼자 저질을 수는 없다. 거기에는 사리사욕을 따라 동조하는  민간인이 꼭 끼어 있다. 
그와 함께 해외 한인사회의 역할을 넣겠다. 특히 서민주의 사회(Egalitarian society)에 살고 있는 호주 한인들에게 대하여서다. 호주인들은 권력과 직위와 돈에 목매지 않아  우리에 비하여 훨씬  평등적이다(이 또한   국제경쟁의 압력과 제3세계 이민자들의 대거 유입으로  많이 퇴색했지만). 이 가치를 몸소 실천하고 고국의 동포들에게 전파하는 일이다. 
나는 1980년대 초 여기에서 창간한 <호주소식>에서 호주 한인들의 고국을 향한 사회문화전도사 역할을 제안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꿈꾸는 소리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간의 추세를 보면 호주 한인들은 한국적 가치에 함몰되어 왔다고 봐진다. 
나는 과거 한국의 통일 전문가와  정치인들이 호주에 와서 여는 세미나에서 언제나 고국을 위한대(對)호주 정부 로비를 해달라는 당부를 듣고  늘 웃긴다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의 한국과 호주는 동심일체라고 할만큼 서로간의 이해가 잘 맞아떨어지고 있다고 보는데, 우리가 따로 로비 할 사항이 무엇일까? 로비가 필요하다면 1차적으로 자체 커뮤니티의 발전과 위상을 위해서라고 믿는 것이다.

김삼오(커뮤니케이션학박사,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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