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팔엔 링거 오른편 가슴엔 다양한 색의 선들이 모니터와 연결되니 나는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간호사들이 계속 주시해야 한다며 커튼을 닫아 주지 않아 밤새도록 간호사들의 움직임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일벌처럼 쉴 새 없이 들락거리는 모습이 무척 부산스럽기도 하였지만 특별한 사명감 없이는 감당키 어려운 직업이라는 생각이 드니 그들이 대단해 보였다. 간호사들의 빠른 움직임처럼 다양한 색으로 변하는 컴퓨터 화면과 신음 그리고 쉴 새 없이 들리는 근거 없는 소리가 마치 오일장 한복판에 서 있는 느낌이다. 응급실로 들어오며 머리 사진과 가슴 X-Ray를 찍었다. 의사가 곧 결과를 가지고 올 거라는 간호사의 확신 없는 대답이었지만 아들과 나는 밤새워 기다렸다. 정오가 훨씬 넘었는가 두런거리는 소리에 설핏 잠에서 깨었다. 눈을 뜬 내게 의사는 의례적인 몇 가지를 물은 뒤 보호자와의 통화를 원했다. ‘이, 삼 주 되어야 결과가 나올 것으로 보이는데요.’ 의사의 말에 ‘그전에 우린 런던으로 떠날 예정인데요.’ 어느새 나의 보호자가 된  아들의 대답이 암담하게 들려왔다. 

무엇이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일까.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던 팬데믹이 사그러지자, 그동안의 칩거한 보상이라도 받는 듯이 사람들의 움직임은 왕성해졌다. 얼마 전 런던으로 이사한 딸이 우리를 초대했다. 결혼 후 둥지를 틀었던 브라이턴이 번잡하지 않은 관광지라 그곳으로 오길 원했다. 몇 개월 후면 휴가를 받을 수 있는 아들까지 함께할 수 있어, 한동안 정지되었던 여행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자신들의 생활에 바빠 얼굴 보기도 쉽지 않은 다 큰 자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기쁨에 몇 달이 후다닥 지나가고 있었다. 슬슬 떠날 준비를 해야 할 날이 가까워져 올 무렵 전혀 예기치 않던 일이 일어났다. 근 한 해 동안 입맛이 없어 먹지 못하던 것의 원인이 나타나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주는 대로 약을 먹고 주사를 맞고 가장 힘들었던 채혈에도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친절한 간호사와 의사의 따뜻함이 낯설었다. 병실 또한 건물 가장 위층에 있어서인지 병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조용했고, 모든 것에 불편한 점이 없다는 것이 점점 더 무기력해져 우울했다. 

갑자기 몇 명의 간호사들이 들어와 부산을 피웠다. 드디어  MRI  촬영 스케줄이 나왔다고 했다. 코로나 이후로 감소한 병원의 인력으로 모든 것이 늦추어지는 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툭툭 벽을 들이받으며 침대를 밀고 가는 비숙련자의 서투름에 웃음이 나오기도 했지만, 잔뜩 긴장한 나를 위해 장난을 하는 것 같아 오히려 고마웠다. 드디어 MRI 촬영 방 앞에 섰다. 몇 겹의 귀막이 위에 이어폰까지 한 후 원통으로 스르르 빨려 들어갔다. 천둥 번개 그리고 모여있던 세상의 온갖 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 같았다. 잠시 멈출 땐 이게 끝인가 긴 한숨을 내쉬었지만 몇 차례나 반복되니 점점 더 겁이 나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들과 날짜를 확인한 딸은 몇 가지 공연 표를 사느라 동분서주했다. 계획상 우리가 도착하는 다음 날에 손흥민 선수가 활동하고 있는 팀의 유럽피언 챔피언십 경기가 있어 날짜를 바꾸면 안 된다며 재차 확인을 해왔다. 청천벽력이었을 소식에 딸의 놀라움은 얼마나 컸을까. 조석으로 들려오는 딸의 목소리엔 답답함이 태연하게 감추어져 있었다. 퇴원해도 탑승을 할 수 있을까하는 소리가 지나쳤지만 귀담아듣고 싶지 않았다. 수술실에서 막 나와 캡을 벗어버린 시원한 긴 머리의 여자가 방으로 들어섰다. 새로 나를 맡게 된 의사의 조수 같았다. ‘퇴원하면 2주 있다가 의사가 보자는데요.’ 그녀의 말에 ‘두 주만 더 늦추면 안 되는지 물어봐 줄 수 있을까요?’ 대답은 하였지만 정히 안된다면 그 안에라도 다녀오고 싶었다. 얼마 전만 해도 여행으로 잔뜩 부풀었던 남편과 나의 아이들 그리고 내 마음도 다녀와야 바람이 빠질 것 같았다.  

나이가 지긋한 거구의 신사가 들어왔다. 여느 날같이 평복을 입은 채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책을 앞에 놓고 있었다. 편안하게 느껴지는 그의 첫인상에 나의 담당의이겠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다. 이미 들어 알고 있는 나의 증상에 대해 간결하게 설명한 후, ‘언제 퇴원해야 딸한테 갈 수 있어요?’ 나직이 물었다. ‘늦어도 내일모레는 퇴원해야 그다음 날 새벽에 떠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를 빤히 쳐다보며 웃으며 대답했다. ‘음 ~ 알았어요.’ 문을 나서며 들릴 듯 말 듯 한 그의 짧은 대답이 여운을 남긴다.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다. 그의 널따란 등 뒤에 희망의 날개가 솟는 것 같았다.

‘네가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가 너를 돕는다’라는 연금술사에 나오는 글귀가 확 떠올랐다.

차루나/수필가, 이효정문학회 (aka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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